토마스 만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웃음이, 비애의 그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이러한 응시의 결과물들이 세계 문학이 낳은 가장 읽을 만한 작품들이라고 평가하게 될 것이다.
나는 카프카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지지한다. 프로이트와 카프카가 교류가 없었다는 이유로, 또는 카프카가 프로이트의 저술을 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카프카의 작품이 프로이트가 분석했던 바로 그 꿈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아르투어 슈니츨러도 애초에 프로이트와 교류가 없었다고 하지 않나? 슈니츨러는 작품 속에서 “꿈에대해” 애기를 했다고 한다. 카프카는 “꿈을” 얘기했다. 뇌피셜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암만 봐도 프로이트가 저술에서 분석했던 꿈들과 너무 비슷하다. 만약 카프카의 작품이 꿈이라면, 그리고 카프카가 꿈을 기록하고 살을 보탠 것인지 작가가 인물을 창작하듯이 꿈을 창작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꿈을 창작한 것이라면, 이것은 대단한 재주다. 상상속에서 수퍼에고 Über-Ich를 잠재울 수 있었으니깐… 보통의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야말로 외계인이라고 부를만 하다.
프로이트의 꿈 사례 중 여동생의 두 친구와 악수하는 꿈이 있다. 여기서 여동생의 두 친구가 여동생의 젖가슴이라는 것을 어떻게 분석해낼 수 있는가? Es는 성적인 것이고 꿈이니까 Es가 자유분방할 것이고 여동생은 여자고 여동생에게 있는 두개… 아마도 성적인 것… 이것이 어떻게 젖가슴으로 “비약”하여 해석될 수 있는가? 충분히 당연하게 젖가슴이라고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렇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꿈을 나도 따라 꾸면 이해할 수 있다. 처음 만난 여성과 악수하는 순간의 설레임과 여동생의 젖가슴을 만지는 설레임이 비슷할 것이라고 느껴진다. 그래서 여동생의 두 친구는 여동생의 젖가슴이라고 짐작한다. 나는 카프카도 이렇게 읽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 꿈을 따라 꾸는 것이 카프카를 읽는 방법이다. 음악을 들을 때 그 음악을 마음 속으로 따라 가듯이 말이다.
<변신>를 읽었을 때 내 과거의 어떤 시절이 떠올랐다. 이유는 정확히는 모르겠다. 왜 무엇이 어떻게 비슷해서 떠올랐다고 설명하기 궁하다. 하지만 그 느낌이, “잠자”가 느꼈을 그 느낌이 그 시절의 내가 연상됐다. 그리고 그 느낌에 공감했다.
카프카는 답을 주지도 않고 질문을 던지지도 않는다. 카프카의 작품은 삶을 성찰하거나 시대상이나 현실을 고발하고 풍자하거나 하는 작품이 아니다. 느낌을 적어내린 것이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시대상을 살펴보며 연구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것은 메인이 아니다. 카프카가 전달하고자 한 것은 느낌이다. 카프카는 부조리함을 고발한 것이 아니라 부조리를 외통수로 마주친 그 불안과 절망과 무력감 자체를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가령 어느 행위 예술가가 하얀 캔버스에 빨간 페인트 한 통을 확 쏟아부었다고 할 때, 그의 사조와 배경과 겪어온 사회에 대해 말해 볼 수는 있겠지만 그 예술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과감한 빨강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어떤 문학작품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감동적인”, “아름다운”, “성찰하게 하는” 등이 있겠지만 카프카의 작품에 어울로는 형용사는 “공감가는” 일지도 모르겠다. “그 느낌 나도 알어” 같은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