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作
상황을 상정하고 하는 질문이 있다.
이 소설은 작가가 하고자 하는 질문에 대한 “상황 상정”이다.
만약에 이렇다면 그래도 이러합니까?
만약에 이러하다면 이런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이런 질문에서 “만약에”에 해당하는 것이 이 소설 책 한 권의 내용이다.
그럼 작가의 질문은 무엇인가?
상황을 상정하는 질문들은 그 상정만으로도
하고자 하는 질문을 유추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작가가 상정한 상황 속 등장인물들은 한없이 불쌍하다.
생명과 존엄이 모두 부정당하고 완벽하게 희망이 차단되었다.
삶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으로 다른 존재에게 이득이 되는 상황을
“잡아 먹힌다”고 한다. 등장인물의 운명이 이러하다.
“식용 가축”과도 같은 삶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죽음이 헌신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의 삶으로 이어진다면
혹은 대의로 이어진다면 혹은 인류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죽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에 남는다면 그것도 죽음이라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알 수도 없는 사람들을 위한 “먹이”가 되어 사라질 뿐이다.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고 사라진다.
이것 보다 더 슬플 수 있을까?
작가는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끔찍한 세계를 만들어 상정했을까?
그래야만 더 명확하게 잘문을 던질 수 있었나?
이 이야기를 읽고 이런 질문이 들었다.
이런 삶을 살고 있다면
그래도 그 삶에서 기쁨, 행복,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이런 삶도 감사할 것이 있나?
그저 있다가 사라지는 것도 의미가 있나?
“초연”해져야하나?
질문자는 기대하는 답이 있으면 힌트도 함께 주곤 한다
등장인물들은 절망 속에서도 사랑을 나누지만
내 생각에 이것은 작가가 말하려는 답이나 힌트가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가련하고 잔혹한 처지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가의 설정으로 보인다.
작가의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그 사랑을 통해 아무 위로도 얻지 못했다.
나는 이 소설을 찬찬히 읽어보며 작가가 독자가 알아차려 주기를 바라는 힌트들을 찾아볼 생각이다.
힌트를 못 찾을 수도 있다.
작가 자신도 답을 못 찾았다면 힌트를 줄 수가 없을 것이다.
단지 우리가 깊게 고민해야할 문제를 공유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작가의 종교관이 궁금해졌다.
“남아있는 나날”과 이 소설의 구조가 비슷한 부분이 있는데
주인공이 절대로, 심지어 비슷하게라도 될 수 없는 존재들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지는 않지만 내가 결코 될 수 없는 존재란 점에서는 절대자를 생각나게 한다.
왠지 작가에게 종교가 있다하더라도 그의 신을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을 분석하려들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라가보지 않겠냐 할지도 모르지만 그러자면 작가의 영화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세계가 너무 참혹해서 끝까지 읽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미 이 소설을 원작으로한 영화를 봤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라가는 것은 기왕에 본 영화까지만 하겠다. 나는 아름다움을 제시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문학은 그런 것 뿐만이 아닌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