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형 감독의 글 중에서

임신 10개 월째의 만삭 아내. 가진 거라곤 통장에 남은 1백 달러. 이런 심난한 마음으로 걷고 있는 서른살의 양아치 건달 청년. 그의 이 름은 ‘실베스타 스텔론’이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걷고 있던 그의 눈엔 거리 포스터가 한 장이 들어왔다. 무하마드 알리와 웨 프너의 헤비급 타이틀전. 라스베이거스 도박사들이 50대1로 알리 승리를 걸 정도로 인기없는 게임이었다.

그래서 자리가 비고 일반 관객석은 싸구려 입장료를 팔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할 일 없는 스탤런은 주머니돈을 털어  이 시합 을 보게 된다. 많은 건달들이 그랬듯이 그도 언젠가 10대 시절 복싱도장을 싸움단련 장소로 생각하고 다녔던 적이 있다. 때리는 게임이란 건 재미있지 않은가.

복싱의 신 알리가 실컷 휘두르는 주먹쇼를 보면 약간은 기분이 풀릴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날은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웨프너라는 이 별 볼일 없는 한물 간 백인 복서가 1회에 알리를 다운시켜 버린 것이다. 관중들은 돌아버렸다.

백인이 알리를 다운 시킨 거다. 스탤론도 흥분했다. 무참하게 얻어 터지다 3회쯤엔 일방적 K.O로 깨질 것 같던 웨프너가 성난 황소처럼 알리를  밀어붙이고 있는 거였다. 그 이후에 일어난 권투장면은 스탤론을 압도했다. 무적의 알리에게 피터지게 맞으면서도 불굴의 투지를 보이는 한 사나이. 지고 이기는 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 피를 줄줄 흘리며 자신이 3류 복서가 아님을 증명하려는 한 남자 의 피의 투혼. 결국 이 시합은 알리의 15회 KO승으로 끝나긴 했지만 스탤론은 웨프너에게 뭐라 말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받 았다.

실제 경기서 영감 얻어 실패에 관계없는 한 인간의 아름다움, 한 남자의 아름다움이 스탤론을 울렸다. X팔-내 인생은 뭐냐.  눈물을 훔치고 거리로 나온 그의 머리에 문득 영감이 스쳤다. 그렇다. 내가 감격한다면 다른 사람도감격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한 번 써 보자. 가끔 엑스트라 건달역을 해온 그는 순간적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생각했다. 웨프너의 시합에다 여 태까지 3류 인생을 살아온 자신의 스토리를 그대로 붙이면 뭐 특별히 테크닉이 따로 없는 괜찮은 시나리오(3류가 아닌)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꼬박 3일간을 닥치는 대로 써댔다. 만삭의 아내가 옆에서마구 써대는 원고를 타이프라이터로  정리했다. 며칠 후 이 대본을 갖고 스탤론은 영화사들로 찾아 돌아다녔다.

원래 한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솔직하게 압축한 얘기는 볼 꺼리(들을 꺼리)가 있게 마련이다. 게다가 이 대본엔 웨프너 시합 에서 영감을 받은 고귀한 정신이 담겨 있었다. 선뜻 10만 달러에 사겠다고 한 영화사 사장이 스탤론에게 제의했다. 그때 스 탤론은 자기가 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결심했던 사항을 털어놓았다.

“돈을 안 주셔도 좋습니다. 저를 이 시나리오의 주인공으로 써 주십시오. 이건 내 이야기이기 때문에 나 이상으로 잘  표현할  사람이 없습니다.” 영화사 사람들은 웃었다. 농담하지 말고 꺼져. 스탤론에겐 갈등이 휘몰아쳤다. 10만 달러면… 그러나 그는 결심을 굳혔다. 나에게 이제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10만 달러가 감지덕지한 돈이긴 하지만 이 스토리는 내가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고귀한 이유와 가치가 있다고 확신 했다. 웨프너의 그 시합. 웨프너는 그때 1회전에 쓰러지나 대충하다 기권하나 개런티를 받았던 상태였다. 그가 피투성이가  되면서 싸운 이유, 그건 일정 개런티 때문이 아니었잖은가. 모두가 시나리오를 거절하는 판국에 이 대본을 본 구멍가게 영화 업자가 자기집을 잡히며 제작을 하겠다고 제의했다. 각본·주연료는 무료. 대신 돈벌면 흥행수입 10%는 날 달라, 이것이 스 탤론의 조건이었다. 영화는 제작비 문제도 있고 미국독립 2백주년인 그 해에 상영이 안되면 ‘꽝’이라는 상황도 있고 해서 28 일만에 제작은 쫑난다. 그리고 이 영화는 1976년 예정대로 흥행에 붙여졌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시합 종료 공이 울리자 흥분한 관객과 기자들과 경기관계자들이 다 링 위로 뛰어오르고, 경기장의 미친 함성이 로키의 아내 에이드리언에게까지 들렸다. 선수대기실에 있던 아내는 남편을 찾아 경기장으로 왔다. 남편은 아내를 선수대기실에서 기다리게 했었다. 에이드리언은 경기 내내 선수대기실에서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록키는 열광하는 관객들과 기자들의 인파에 둘러쌓인 채, 거의 울부짖으며 애타게 아내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에이드리언은 사람들을 헤치고 간신히 간신히 남편에게 다가간다. 로키는 맞아서 부어터지고 피 흘리는 눈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아내에게 묻는다.

“에이드리언, 모자는 어디 있어?”

최선을 다해 훈련했지만 상대는 세계 최고의 챔피언이고 자신은 수도 없이 쳐 맞을 것이다. 마음이 여린 아내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아내는 가슴이 아파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그래서 록키는 아내를 선수대기실에서 기다리게 했었다. 에이드리언은 분명 자신이 가진 옷 중에서 가장 비싸고 예쁜 옷을 입고 왔을 것이다. 아래 포스터의 저 옷이다. 가난하지만 차려입을 자리에 입고갈 옷 한 벌은 있었겠지. 경기 내내 죽도록 쳐 맞으며 사투를 벌이던 로키의 머리 속에는 선수대기실에 데려다 놓은 예쁜 옷을 입은 아내의 마지막 모습만 사진처럼 떠올랐고, 시합이 끝나자 간절히 너무나 간절히 아내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타난 아내의 모습은 머릿속에 사진처럼 떠올리고 있던 모습과 달리 모자가 없었다. 애타게 남편을 향해 인파를 헤치고 오며 모자를 떨군 것이다.

실은 영화는 좀 다르다. 글 써놓고 영화를 다시 보니 내가 잘못 기억하는 부분이 많네. 하지만 마지막 대사는 저게 맞다.